1. 히어로의 탈을 쓴 반영웅들: 마블의 새로운 전환점
《썬더볼츠(Thunderbolts)》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페이즈 5 후반부를 책임질 핵심 작품으로, 전통적 히어로 서사에서 이탈한 ‘반영웅’ 집단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계승한 존 워커(US 에이전트), 전직 러시아 스파이 옐레나 벨로바, 골수 생존주의자 레드 가디언, 베일에 싸인 고스트, 마스터 암살자 타스크마스터 등, 이질적이면서도 각자의 트라우마와 그림자를 지닌 인물들이 하나의 팀으로 모인다. 이들은 기존 히어로들과 달리 윤리적 확신보다는 생존과 과거의 속죄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며, 이 영화는 그러한 ‘어둠 속 정의’라는 복합적인 개념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히어로물에 대한 피로감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썬더볼츠》는 전형성을 벗어난 혼종적 캐릭터 구성을 통해 서사적 신선함을 제공하고자 한다. 특히 이들은 자발적인 사명의식보다 외부 권력에 의해 소환되거나 통제되는 존재들로, 팀의 정체성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액션과 팀워크로 흘러가는 기존 마블 포뮬러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정치적 배경을 함께 탐색하는 새로운 서사 축을 형성한다.
2. 국가의 대리인인가, 도덕의 이탈자인가: 정치적 명령과 개인의 선택
《썬더볼츠》의 기획 의도는 단순한 '악당들의 팀업'을 넘어선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악인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도태되거나 이용당한 자들이며, 국가나 권력에 의해 조건부 사면 혹은 대체 임무를 부여받은 '계약형 히어로'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일반 대중이 기대하는 도덕적 정의와는 괴리된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는 국가와 도덕, 법과 윤리 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영웅의 정의가 언제부터 국가의 명령으로 대체되었는지를 묻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품은 ‘정의’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교란시킨다. 옐레나의 복수는 정의인가? 고스트의 존재는 테러리스트인가 피해자인가? 팀의 리더가 될 예정인 콘티사 발렌티나 알레그라 드 퐁텐은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영화의 중심 주제인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더 이상 MCU는 명확한 선악 구도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썬더볼츠》는 그 과감한 선을 넘는 첫 사례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3. 연출과 구성: 다중 감정선과 팀 내 역학의 드라마
감독 제이크 슈라이어는 각기 다른 배경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하나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갈등과 유대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설계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팀플레이 액션이 아니라, ‘함께 있음’의 긴장감과 감정적 격돌을 밀도 있게 조망한다. 옐레나와 레드 가디언 사이의 복잡한 부녀 관계, 타스크마스터의 침묵 속 기억, 고스트의 존재 불안정성은 단순한 캐릭터 묘사를 넘어, 팀 내 갈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연출은 이러한 감정의 결을 강조하기 위해 색감과 조명을 유기적으로 활용한다. 블랙과 그레이 톤이 지배적인 배경 속에서, 각 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명암 대비가 극적으로 구성되며, 전투 장면조차 심리적 밀도와 맞물려 흘러간다. 특히 마블 특유의 유머가 배제되거나 최소화됨으로써, 전체 톤은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는 마치 ‘DC적 무게감’을 빌려온 듯한 인상을 주며, 기존 MCU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체성을 확보한다.
4. 상징과 비판: 히어로 산업의 전환점
《썬더볼츠》는 본질적으로 ‘히어로’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메타 서사로 기능한다. 슈퍼히어로라는 상징은 이제 자율적 정의 실현의 주체라기보다,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원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문제의식이 중심에 있다. 팀원 개개인이 지닌 특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닌 과거, 트라우마, 국가와의 관계다. 이 영화는 그러한 과거와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의 윤리 의식을 좌우하는지를 드러내며, 더 이상 히어로라는 타이틀이 정의의 보증이 아님을 선언한다.
또한 이 작품은 포스트-히어로 시대의 방향성을 상징한다. 더 이상 ‘누구를 구할 것인가’가 아닌, ‘누구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가’가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는 MCU 내부에서조차 이례적이다. 이는 《시빌 워》에서 시작된 ‘히어로의 정치화’ 흐름을 계승하면서도, 이제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썬더볼츠》는 마블이 단순한 영웅담을 넘어, 사회 정치적 장르로 확장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이기도 하다.
5. 이 영화는 어떤 점에서 응답을 이끌어내는가
《썬더볼츠》는 관객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며, 단순한 쾌감이 아닌 윤리적 숙고를 요구한다. 각자의 상처와 죄를 안고 모인 이들은 완전하지 않기에 더욱 인간적이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강요된 자리’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들이다. 이 영화는 MCU가 더 이상 영웅 서사에 갇히지 않고, 사회적 구조와 개인의 내면을 동시에 조명할 수 있는 성숙한 장르로 진입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단지 마블의 실험이 아닌, 블록버스터 산업 전체가 새로운 응답을 요구받고 있다는 상징적 선언이기도 하다.
한 줄 평: 정의의 얼굴을 한 그림자들, 그들이 만든 팀이 던지는 윤리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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